2024. 03. 09., 서울 용산구 이촌동 319.

먼지가 떠돌아 희끗한 하늘조차

2024. 03. 09.,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포항역로 1.

잠을 쫓을 때에서야 나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빛이 많이 들지 않아도 일찍 눈이 떠지는 날이 있어요. 별로 기대되지 않는 약속이라고 생각한건 오판이었습니다. 오늘 약속이 기대되었나봐요. 오늘 약속이 설렜나봐요. 어른이 되기는 한참 글렀다고 생각하며 나설 준비를 했습니다.

2024. 03. 09., 대전 동구 중앙로 215.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챙겼던 짐을 체크리스트 형태로 문서화를 해둡니다. 다음에 외출할 때 비슷했던 일정의 체크리스트를 꺼내보면서 짐을 챙기는게 편리하더라고요. 그 모든 체크리스트에 노트북이 항상 끼어있었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병적으로 챙겨다녔어요. 급하게 할 일이 생기면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이 앞 선 탓이겠습니다.

그런 내가 싫어졌습니다. 노트북을 백팩에서 다시 꺼냈습니다. 백팩도 다시 옷장에 넣어버렸어요. 어깨 한 쪽에 맬 수 있는 작은 가방을 꺼내서 소설 두 권을 챙겼습니다.

대전역 대합실에서 너가 나의 가방에 달린 인형을 만질 때에서야 책 읽기를 중단했습니다.

2024. 03. 09., 대전 동구 태전로 56-20.

저번에 너를 만났을 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어디 갈까 물어보기만 했던게 미안해서 식당 목록을 조금 찍어갔습니다. 하나 하나 보여주다가 결국에는 너가 찾은 곳을 골랐습니다. 그게 더 좋아보여서. “명랑식당”이라는 곳이었는데, 육개장만 파는 곳이었습니다. 식당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연령대가 맛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전분이 들어갔는지 국물이 조금 걸쭉한 느낌이 있었는데, 파가 많이 들어가서 맛이 그렇게 답답하지 않았어요. 중독성 있는 맛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이 만나면 꼭 학교 이야기를 해요. 우리 학교는 이런데 너희 학교는 이렇더라가 주요 골자입니다. 지방의 작은 학교에 다니는 나는 큰 학교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꼭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동경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 이야기도 했어요. 최근에 머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무렴 잘생겼는데 뭐 어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의 주변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난 머리가 조금 깔끔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머릿결이 안좋은게 신경쓰여서 최근에 트리트먼트랑 에센스를 바르기 시작했는데 효과가 있나봐요. — 내 머리가 엉망이었던건 서울에 도착해서야 알았습니다.

너를 따라 걸었습니다. 먼지가 떠돌아 살짝 희끗한 하늘조차 예뻐보였어요. 냇가의 2미터 남짓한 다리에서 키를 쟀습니다.

2024. 03. 09., 대전 동구 대동천우안5길 38 1층. 2024. 03. 09., 대전 동구 대동천우안5길 38 1층.

카야 토스트를 먹어본 적 없다는 나의 말에 카페가 빠르게 정해졌습니다. 소제동에 위치한 베트남식의 카페였어요. 햇빛이 좋아서 루프탑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난간에서 수채화로 풍경을 그리고 있었어요. 길을 가는 친구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여유로웠습다. 그 사람들 뒤에 두 자리가 남아있었어요. 햇빛이 조금 더 비치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선크림은 챙겨올걸 후회했습니다.

이야기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아요. 지난주에 다녀온 엠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음악 이야기도 했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햇빛 아래 코트를 덮고 있던 너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맡아보라고 한 향기는 생경했습니다.

대전역에서 산책을 중단했습니다.

2024. 03. 09., 서울 용산구 이촌동 319.

예매해둔 KTX를 타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기차 시간을 옮길까 싶어서 확인해보니 거의 다 매진이었어서 10여분 밖에 땡기지 못했어요. 대전역을 서성이면서 헤일리랑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려고 아무 생각 없이 전화한거였는데, 서울에서 만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서울 뜬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이 많은 플랫폼을 보면 숨이 막힙니다. 공연장이 합정역에 있어서, 공항철도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홍대입구에서 환승을 해야했어요. 플랫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압박감늘 느꼈습니다. 환승통로에서는 발가락에 압박감을 느꼈어요. 잘 신지 않던 가죽신발을 신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명랑식당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귀찮아했는데, 그때 잠시 벗어둔게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압박감을 이겨내고 합정역에 도착해서는 공연장을 찾는데 몰두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주상복합 쇼핑몰 안에 공연장을 둘 생각을 한 걸까요. 한참을 헤매다 공연장에 도착했고, 현장 사전 이벤트는 마감되어 있었습니다.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티켓을 수령하고 입장이 시작될 때 까지 사진을 이리저리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여러 콘서트를 다니면서 포토월에서 사진 찍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처음에는 줄 서는 것도 잘 못했고, 줄을 서도 뒷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하는데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작년부터는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었고 나는 포토월에서 사진을 부탁하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나봐요. 이번 콘서트는 사람이 몇 없어서 그런지 줄을 서지 않아서 정말 임의의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해야했고, 나는 용기가 생길 때까지 한참을 서있어야 했습니다.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관객 입장이 시작되고 무대를 보았을 때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 드레스코드를 수상한 교인으로 설정하였는지 한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수상한 종교의 포교 현장을 주제로 하는 뮤지컬의 세트 같았어요. 그 앞에서 직원분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행사의 식순과 주보가 적혀있는 종이였는데, 이 치밀한 컨셉에 만족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보통 콘서트는 제시간보다 늦게 시작하기 마련인데, 7시가 되자마자 어두워진 무대 위로 초를 든 자우림이 등장했어요. 정말 수상한 종교의 교주들 같았습니다. 콘서트는 전체적으로 주보에 적힌 기도를 하나 읽으면 두 세곡 정도를 공연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최근 콘서트에 올리지 않았던 곡들로만 구성되어있었어요. 정말 여한이 없는 셋리스트였습니다.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2024. 03. 09., 서울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2층.

기도를 올리는 사이사이에는 토크와 이벤트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퀴즈나 추첨을 통해 상품도 주고, 베스트 드레서를 뽑는 이벤트도 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시덥잖은 이야기를 많이 해줘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바라던게 그거거든. 하지만 무엇보다 응원봉이 생긴다는 소식이 제일 파격적이었어요. 작년 Midnight Express 서울 토요일 콘서트에서 앞앞에 있던 분이 소원으로 빌었었는데, 그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기획했다고 합니다. 응원봉 이름이 “퍼플 하트”라니 너무 기대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밴드에 응원봉이라니 약간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막상 나오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

공연이 끝나고는 샛별과 더빠를 가려고 했는데 샛별의 컨디션이 좋지 못했습니다. 다른 친구와 놀다가 들어갈까 했는데 서울에 친구가 없음을 깨닫고 얌전히 샛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우림 콘서트의 위대함에 대해 설파하다가 잠에 들었어요.

네가지의 기괴한 꿈을 꿨고 눈을 뜬 건 열시였습니다. 조금 뭉개다가 나갈 준비를 했어요. 날씨도 좋아서 여유롭게 산책이나 할 겸 일찍 출발했는데 그럴 시간에 안챙긴거 없나 확인할 걸 그랬습니다. 짐을 몇 개 놓고 와서 샛별에게 택배를 부탁했어요. 번거롭게해서 미안했습니다.

헤일리가 늦잠 잤다는 소식을 들은건 사당역에서였습니다. 30분 정도 늦는대요. 나도 늦을 것 같다고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명동역에 먼저 도착해서 혼자 산책이나할까 했는데 발이 너무 아파서 포기했어요. 30분 동안 서서 듀오링고나 했습니다.

2024. 03. 10., 서울 중구 소공로 64 동남빌딩.

란주칼면에 갔습니다. 도삭면을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어서 궁금했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줄이 엄청 길어서 걱정했는데 회전율이 좋아서 다행히 금방 주문할 수 있었습니다. 꿔바로우를 먹을까말까 한참 고민하다 그냥 둘 다 양고기 도삭면을 먹었습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적당했고 쯔란과의 조합이 좋았습니다. 카운터 옆 자리였는데, 홀 직원분이 주방과 소통할 때 중국어로 하시더라고요. 헤일리의 도움을 받아 몇몇 문장을 해석해냈습니다. “몇 번 식탁에 몇 명”의 반복이긴했지만, 듀오링고를 헛으로 한 건 아니구나 생각하며 뿌듯해졌습니다.

2024. 03. 10., 서울 중구 명동2길 22.

헤일리가 발목이 불편한 관계로 근처의 아무 카페나 갔는데 꽤나 괜찮았습니다. 커피 맛은 평범했고, 디저트는 맛있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대형 카페의 디저트를 불신하는 편이라 과대평가되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타르트가 조금 딱딱한 걸 빼면 괜찮았습니다. 헤일리가 휴학을 해서 포항에서 얼굴 볼 일이 많진 않았지만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자주 하거든요. 그냥 근황 이야기 깨작깨작하다가 자우림 콘서트의 위대함을 설파했습니다.

2024. 03. 10., 서울 중구 명동2길 22. 2024. 03. 10., 서울 중구 명동2길 22.

명동 거리 산책을 하다가 늦었음을 깨닫고 급하게 서울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구두를 신고 뛰는건 아파요. 그래도 기차를 놓치지 않은 값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공교롭게도 9번째 트랙이었습니다.

2024. 03. 10.,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405.

그게 나의 전부란 걸

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내 마음대로 정의해봤어요. 내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확신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인 것 같습니다. 나는 한참 먼 것 같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어른스럽지 않은 삶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권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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